네팔의 여신 쿠마리
쿠마리, 혹은 쿠마리 데비(Kumari Devi)는 네팔에서 '살아 있는 여신'으로 추앙받는 소녀다. 열 살이 채 안 된 어린이가 여신의 화신이라는 것이다. '쿠마리'는 '처녀'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카우마 리아(Kaumarya)'에서 파생된 말이다. 네팔어로는 '결혼하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를 뜻한다.

네팔에서 쿠마리의 역할은 여신으로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그리고 축제 때가 되면 여신의 화려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화려한 머리 장식과 화장, 강렬한 빨간색의 옷차림이 눈에 띄는 쿠마리는 원래 힌두교의 고대 여신 '탈레주'의 화신이다. 하지만 네팔에서는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의 숭배 대상이다. 쿠마리라는 탈레주의 화신을 선정한 것은 1757년부터, 그리고 지금처럼 쿠마리를 사원에 모셔서 숭배하기 시작한 것은 1918년부터이다.

쿠마리의 탄생을 두고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말라(Malla)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자야프라카쉬 말라(Jayaprakash Malla) 왕 때의 일이다. 어느 늦은 밤 붉은 뱀이 트리파사(Tripasa)라는 주사위 놀이를 즐기던 왕의 처소에 고대 힌두교의 여신 탈레주(Taleju, 네팔에서는 '두르가(Durga)'로 불린다)와 함께 왔다. 탈레주는 매일 밤 왕과 주사위 놀이를 하러 왕을 찾았다. 탈레주는 그들의 놀이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고 왕에게 주의를 주었다.
어느 날 밤, 왕비는 왕이 누구를 그토록 자주 만나는지 궁금했다. 몰래 왕을 따라 방에 들어간 왕비는 마침 그곳에 있던 탈레주와 마주쳤다. 왕은 탈레주의 노여움을 샀다. 탈레주는 왕과 왕국을 더 이상 지켜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왕은 용서를 빌었다. 탈레주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자신이 네와르(Newar)족 1) 중에서 샤카(Shaka 또는 Chaka. 석가모니의 성씨) 성을 가진 한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니 그 소녀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왕은 왕궁을 떠나 탈레주의 영혼이 깃든 소녀를 찾아 나섰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내용의 전설도 있다.
그 전설은 자야프라카쉬 말라왕보다 1세기쯤 앞서 살았던 트라일로캬(Trailokya)왕 때의 일로 알려진 내용이다. 매일 밤 여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왕을 찾아 트리파사라는 주사위 게임을 하면서 나라의 번영을 논의했다. 어느 날 밤 이성을 잃은 트라일로캬왕은 탈레주를 범하려 했고 분노한 여신은 더 이상 궁전을 방문하지 않았다.
왕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간곡히 용서를 빌었다. 왕의 태도에 분노가 누그러든 여신은 네와르족 샤카 성을 가진, 초경이 시작되기 전의 아이를 자신의 분신으로 두어 극진히 섬기라고 했다.
네팔에는 대여섯 명의 쿠마리가 있다. 그중 으뜸은 카트만두(Kathmandu) 왕실의 쿠마리다. 이 쿠마리는 카트만두 시내 더르바르(Durbar) 광장에 있는 쿠마리 사원에서 생활한다. 여신 탈레주 의 '화신'인 만큼 이 소녀를 선발하는 과정은 꽤 까다롭다.
우선 왕과 종교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위원회에서 4세에서 7세까지의 소녀들을 후보로 선발한다. 쿠마리의 후보가 되는 여자아이는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소라고둥과 같은 목
소 같은 속눈썹
사슴 같은 허벅지
사자 같은 가슴
오리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분명한 목소리
새카만 머리카락
앙증맞게 작은 손과 발
쿠마리 후보는 외모에서만 32가지에 대해 심사받는다. 예언 능력도 심사 대상이 된다. 쿠마리가 되는 소녀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덕목은 평온함, 그리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가짐이다. 탈레주가 용감하고 무서운 여신이기에 더욱 그렇다.
심사는 네팔의 가장 큰 축제인 '다사인(Dasain) 축제'에서 절정을 이룬다. 다사인 축제는 고대 신 들이 인간을 괴롭히던 악마를 물리친 것을 찬양하며 15일 동안 펼쳐지는 가을축제다. 신화에 따르면 이때 전사로 나선 신이 바로 탈레주 여신이었다. 탈레주는 싸움을 시작한 지 10일째 승리를 거두었다.
승리를 거두기 이틀 전의 밤, 곧 축제의 여덟 번째 밤은 '칼라띠(Kalratri, 검은 밤)'라고 불린다. 칼 라띠는 탈레주와 '전쟁과 파괴의 신' 칼리(Kali)를 위한 밤이다. 이날 밤 탈레주 사원 안마당에 54 마리의 버펄로와 54마리의 염소가 이들을 위한 제물로 바쳐진다. 제물로 바쳐진 동물들은 고대 악마를 상징한다. 그래서 목이 잘려져 그 피를 신상(神像)과 주변에 뿌리게 된다.
어린 쿠마리 후보는 이때 탈레주 사원 안마당으로 들어가야 한다. 안마당에는 칼리 여신의 제물로 바쳐진 동물들의 잘려진 머리 그림자가 촛불에 일렁인다. 무서운 형상의 마스크를 쓴 남자들이 춤을 춘다. 탈레주의 화신이 될 능력이 있는 후보라면 그 으스스한 시간을 침착하게 이겨내야 한다. 더욱이 버펄로와 염소의 머리들이 놓여 있는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물론 두려워하는 건 금물이다. 끝으로 자신 앞에 놓인 여러 물건들 중에서 전임 쿠마리의 소지품을 가려내는 시험이 기다린다. 모든 과정을 통과한 아이에게 쿠마리의 자격이 주어진다. 시대가 바뀌면서 과정들 중 일부는 조금씩 생략되고 있다.

까다로운 자격 요건과 심사를 거쳐 선발된 쿠마리는 예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언제나 빨간 옷을 입고 머리를 틀어 올려야 한다. 이마에는 인도 힌두 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 '아그니 (Agni)'처 럼 '불의 눈'을 그린다. 불의 눈은 쿠마리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통찰력의 상징이다.
출처 : 갖고 싶은 세계의 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