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암행어사 마패의 말을 다 써버리면??

김쌤선생 2024. 4. 29. 07:56
반응형

마패(馬)

마패는 관리들이 공무(公務)로 지방에 갈 때 나라의 말을 이용할 수 있도록 증표로 쓰던 패입니다.

지름이 10cm 정도인 동그란 구리 패에 말 그림이 1-10마리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전국의 주요 지역에 말을 빌릴 수 있는 역(驛)을 설치했습니다. 관리들은 역에서 역으로 이동하며 잠도 자고 말도 바꾸어 탈 수 있었습니다. 이 제도를 역참제(驛站制)라고 합니다.


고려후기 원(元) 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말사용이 엄격히 제한되었고, 이 때문에 허락받은 관리만 이 말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마패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처음에는 마패를 나무로 만들었지만 쉽게 부 러지거나 손상되자 1434년(세종 16)에 철로 만들어 사용했고, 이후에는 구리로 만들었습니다.

마패는 양면에 각각 다른 내용을 새겼습니다. 한 면에는 관리가 이용할 수 있는 말의 수를 새겼는 데, 이는 관리의 등급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다른 면에는 주조 일시인 '연호(號)와 연월일'과 임 금의 도장을 담당하는 관청인 상서원(尙瑞院)에서 이 마패를 발급했음을 증명하는 상서원인(尙書 院印)이란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마패로 부릴 수 있는 말의 수는 1-10마리까지지만, 실제로는 1-3마리 정도였습니다. 암행어사의 경우도 대부분 3마리가 그려진 3 마패를 썼고, 10마리가 그려진 것은 왕실에서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承政院)에서 마패를 발급했습니다. 그 뒤 「경국대전(經 國大典)』에서는 중앙의 경우 왕명(王命)을 받들고 다니는 관원은 병조(兵曹)에서 증서를 받으면 상서원에서 왕에게 보고해 마패를 발급한다고 규정했고, 지방에서는 관찰사(觀察使) 등이 마패를 지급받아 보고를 올리거나 진상(進上)을 하는 등 필요한 때에 말을 이용했습니다. 군사 사정으로 긴급한 경우는 쌍마(雙馬)를 이용하고 '긴급사(緊急事)'라는 글자를 새겨 밤낮으로 달리게 했습니다.


마패를 파손한 자는 장(杖) 80, 도 2년의 형벌이나 사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1511년 (중종 6) 12월의 기록에 보이는 상서원의 서리(書吏)로 근무하던 최맹손(崔孟孫)같이 마패를 도 둑질해 술과 밥으로 바꾸어 먹는 경우도 간혹 있었습니다. 또 중국의 왕조가 바뀌면 대부분 연호 (號)를 바꾸었으므로 마패 또한 자주 다시 만들었습니다. 1730년(영조 6) 6월 기록에 따르면, 당시 각 지방에 160여 개, 중앙에 500여 개 등 모두 670여 개의 마패를 주조해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조 대에는 여전히 명나라 연호가 새겨진 마패를 사용하다가 청나라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영조 6년(1730) 제주 사람이 표류해 청나라에 이르렀는데, 그가 가진 마패에 명나라의 연호인 '천계(天啓)'가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전부터 쓰던 마패를 미처 다 교환하지 못한 것이라 해명하며 해결되었지만, 『영조실록』의 여러 기사에서 당시 한 달간의 급박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마패는 왕의 특명을 받고 비밀리에 민정을 살핀 임시 관직인 암행어사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암행어사는 왕에게 봉서(書)와 『사목(事目)』, 유척(尺), 마패를 받고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봉서'는 암행할 지역과 임무가 적힌 비밀 편지이고, 사목은 암행어사의 할 일을 적어 놓은 책입니다. 또한 '유척'은 시체를 검시할 때 쓰는 자이며, '마패'는 역에서 말을 빌리거나 역졸을 부릴 수 있는 권한을 증명하는 패입니다.


암행어사에게 발급하는 마패는 왕과 시대에 따라 달랐는데, 숙종과 영조는 3 마패를, 고종은 주로 2 마패를 주었습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암행어사에게 상등마(上馬) 1 필, 중등마(中 等馬) 1 필과 짐을 나르는 태마(馬) 1 필을 주도록 규정해 놓았습니다. 암행어사는 관리 중 품계가 높지 않은 당하관(堂下官)이었지만, 임무의 특성상 고관(高官)만이 타는 상등마를 탈 수 있었습니다.

반응형